[뮤지션 및 영화]/뮤지션 이야기

U2

피터팬2 2009. 2. 25. 07:41

 

 

날카로운 비판정신에서 우러나온 정의수호주의와 포스트 펑크의 실험정신이 결합된 그룹 유투(U2)는 압도적인 사운드에 정치와 종교에

관한 장엄한 가사들로, 신디사이저 팝과 헤비메틀이 주도하는 80년대에 최고의 로큰롤 전사로서 오랫동안 지지를 받고 있는 아일랜드

그룹이다.

 

23년 이상 그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77년 고등학교 친구인 Bono(본명 Paul Hewson, 보컬), Edge(본명 David Evans, 기타),

Adam Clayton(베이스), Larry Mullen(드럼)으로 구성되었다. 피드백(Feedback)이란 이름 하에 Rolling Stones와 Beach Boys의

곡을 연주하던 이들은, 잠시 그룹 이름을 하이프(Hype)로 바꾸었다가 78년에 유투(U2)로 최종 결정하게 된다. 그해 탤런트 콘테스트

에서 수상을 한 이들은 아일랜드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셀프 타이틀의 EP [U2: 3]를 발매한다. EP 트랙 중 싱글 'Out of Control'(79), 

'Another Day'(80)가 아일랜드 차트 1위에 등극하자 이에 힘입은 이들은 '11 O'clock Tick Tock'(80)으로 UK 차트 11위로 데뷔한다.

이어 발표한 두 싱글 'A Day Without Me', 'I'll Follow'와 이어 발표한 데뷔 앨범 [Boy](80)는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노의 열정적인 보컬과 그룹의 짜임새 있는 리듬이 돋보이는 유투의 화려한 라이브 무대는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유투 마니아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81년 거의 복음적인 내용으로 신앙적인 신념을 담은 앨범 [October]는 'Fire'와 'Gloria'로 인기를 얻으며 호평을 받았고, 83년 역시

신앙적이고 정치적인 모순을 고발하는 현실적인 주제의 [War]는 키 트랙인 'Sunday Bloody Sunday'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같은 해 유투의 격정적인 무대가 고스란히 담긴 라이브 앨범 [Under A Blood Red Sky]로 UK 차트 2위에 오르고 US 차트 28위를

차지한 이들은 록 엘리트로서 선두에 서게 된다. 84년 밥 딜런(Bob Dylan)의 공연에 보노가 듀엣으로 참여한 뒤, 유투는 자신들의

회사인 마더 레코드사를 설립하고 [The Unforgettable Fire](84)를 발표한다. 신디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사용한 이 앨범은 'Pride

(In the Nmae of Love)'로 이들의 상업적인 성공력을 다시금 증명했다.

 

이들의 음악과 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인류애로 가득 찬 유투는 이어 Live Aid와 아일랜드 Ireland's Self Aid 같은 자선공연과 국제

사면위원회 활동, Little Steven의 반-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를 위한 싱글 'Sun City' 작업에

참여했다. 87년 [The Joshua Tree]로 US, UK 차트 톱의 자리를 점유하며 전세계적인 수퍼스타 그룹으로 등극한 유투는 이 앨범을 통해

더 새롭게 확장된 사운드와 자기 반성적인 가사들을 선보였다. 이들 작품에 내재된 영혼구원과 동기부여에 관한 주제는 'With or Without

You',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에서 여실히 드러났고, 두 싱글 모두 US 넘버원의 자리에 오르면서 그 해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Album of the Year)을 수상하게 된다.

 

 

이어 라이브 트랙과 신곡들이 수록된 더블 앨범이자 순회공연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제작한 영화 [Rattle And Hum](88)을 발표한 유투는

R&B풍의 'Desire'로 UK 싱글 차트 1위에 오르게 된다. 그 후 3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Achtung Baby](91)는 매우 인상적인 작품으로

전자 음악과 댄스 음악을 가미하여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 사운드인 포스트 펑크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음악적 다양성을 구가하려는

유투의 실험정신은 계속 이어져 93년 [Zooropa]를 발표하게 된다. [Achtung Baby]보다 더 댄스 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테크노

까지 결합된 이 앨범은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으며 2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지만 별다른 히트곡은 없었다. 앨범발매에 따른 순회공연 이후

한동안 휴식기를 가진 유투는 영화 [Batman Forever]의 주제곡인 'Hold Me, Thrill Me, Kiss Me, Kill Me'(95)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해 [Passengers: The Original Soundtrack]을 발매한다. 97년 더욱더 댄스, 테크노, 전자 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앨범 [Pop]을

선보인 유투는 98년 그들의 첫 히트곡 편집앨범인 [The Best Of U2 1980-1990]을 발표하며 폴리그램과 50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식지 않는 열정과 창작력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상업적인 성공을 누리며 골수팬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의연하게 자신들의 뚜렷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사회 비판적

이면서 자기 성찰적인 메시지와 변화무쌍한 음악을 선보이며 팝계에 자리잡고 있는 유투는, 조화를 잃지 않는 밴드의 화합을 자랑하며

20년 넘게 명곡들을 선보이고 있다.

 

 

 

 U2 vs R.E.M

 


 

펑크의 토양에서 자라난 지성적 밴드의 대결

U2와 R.E.M.은 꽤나 닮은 점이 많다. 이름부터가 모두 영문 이니셜로 이루어져 있다. 음악이야 서로의 개성을 농축한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고 있지만 그 원류를 따라가면 출발점도 비슷하다. U2와 R.E.M. 멤버들에게 영향을 미친 음악은 1970년대 중 후반의 펑크(punk)

록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포스트 펑크' 밴드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다. U2가 아일랜드 출신이라서 지형적으로 가까운 영국 펑크 밴드

들한테 영향을 받고, R.E.M.은 미국 펑크 밴드들로부터 정신을 수유했다는 점만이 약간 다를 뿐이다.

U2의 기타리스트인 디 에지(The Edge)는 말한다. "우린 일찍이 클래시(Clash)의 자세를 좋아했다. 리처드 헬

앤드 더 보이도이스(Richard Hell And The Voidoids), 섹스 피스톨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강력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톰 벌레인(Tom Verlaine)의 음악을 경청했다."

R.E.M.의 보컬리스트 마이클 스타이프(Michael Stipe) 역시 청소년기에 누이들과 하릴없이 거리를 방황하다가

1975년 어느날 패티 스미스(Patti Smith)와 막 싹트고 있던 뉴욕 펑크에 대한 글을 읽고 야망을 품게 된다.

이 때 스타이프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3장의 앨범을 구입했는데, 그것은 패티 스미스의 <Horses>,

텔레비전(Television)의 <Marquee Moon>, 그리고 와이어(Wire)의 <Pink Flag>였다.

디 에지가 경청했다는 톰 벌레인은 바로 초기 펑크 밴드 텔레비전의 프론트 맨이다. 서로 같은 음반을 듣고 꿈을 키워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두 그룹이 같은 세대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U2의 Bono와 R.E.M.의 마이클 스타이프는 1960년생 동갑내기다. 다른 멤버들은 뒤늦게 알려진 R.E.M.이 오히려 한두 살씩 더 많다.

우리 식으로 엄격하게 따지면 R.E.M.이 '형님'이 된다.

이들의 음악적 뿌리가 펑크라는 사실은 국내 록 팬들의 청취 경향과 관련해 '불우한' 공통점을 하나 빚어낸다. 그것은 서구 음악 시장에서

두 그룹이 깃발을 아무리 펄펄 휘날렸어도 우리나라에선 지독히도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U2와 R.E.M.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이

1980년대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국내 록마니아들은 압도적으로 화려한 기타 테크닉이 지배한 헤비 메탈에 경도되었다.

우리는 펑크의 단순한 '배킹'이 중심이 된 디 에지와 R.E.M.의 피터 벅(Peter Buck) 기타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솔직히 '시시하게'

또 실력이 별로 없는 것으로 여겼다.

모던 록의 시대라는 지금도 아직 이런 요소가 남아 있다. 한국 폴리그램(이제 유니버셜이 됐다)의 집계를 보면 U2의 POP 앨범은

4만 5천장이 나간데 비해 메탈리카의 <Re-Load>는 12만 장이 넘게 팔렸다.

그래도 1990년대에 들어선 사정이 괜찮아진 편이다. R.E.M.과 U2 음악에 대한 기사도 늘어났고 분위기가 많이 호전됐기 때문이다.

좋게 보면 이들은 '모던 록의 시조'라 할 만하다. 숫제 R.E.M.은 '얼터너티브 록의 원조'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붙는다. 모던 록의 길을

일찍 텄다는 점, 바로 이것이 두 그룹의 위대성이다.

이들의 유사점은 또 있다. U2가 아일랜드 출신이고 R.E.M.이 소외된 미국 남부의 조지아주 Athens 출신이란 것도 어쩌면 공동운명체라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뉴욕과 LA를 양축으로 하는 미국 주류 음악계에서 볼 때 두 그룹은 명백히 주변인들이다.


 

 R.E.M


 

U2와 R.E.M.의 스타덤은 따라서 주변인들의 위대한 반란이다. 이들의 분발에 록계가 높은 점수를 매긴 데는 이들이 록의 메이저리그

출신이 아니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그룹을 한 동아리로 묶는데는 '지성적'이라는 규정성도 한 몫을 한다. U2는 정치적이었고 영국 펑크의 정신을 수혈한 탓인지 초기부터

정치적 밴드로 명성을 다져왔다. 지금도 U2는 전 세계에 걸쳐 정치 지도자, 고위 관료, 대학교수 등 지식인 집단의 주목을 받는다.

R.E.M.이 미국의 젊은 지성인들인 대학생의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누추한 피자가게 밴드에서 일약 주류 그룹으로 신분 도약한 사실은

유명하다. R.E.M.은 예나 지금이나 대학가의 방송국이 길러낸 '칼리지 록 밴드'로 통한다.

두 그룹이 황량한 시기였던 1980년대에 남긴 위대한 족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수렁에 빠진 그 시대의 록을 구출했다는

점에서 공식적으로 함께 범주화되는 일도 빈번하다.

R.E.M.이 1989년 <Green> 앨범으로 메인스트림을 관통했을 때 <서커스>지는 이렇게 썼다.

"R.E.M.은 U2와 함께 모던 록의 가장 빛나는 성공담이다."

<서커스>지 뿐만 아니라 어떤 잡지와 록 관련 서적을 들쳐봐도 80년대의 명반 리스트에 이들의 앨범 2장 이상은 꼭 들어간다.

'앨범의 라이벌'이라고 할까? 두 그룹이 수작 앨범 부문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는지를 보자.

모던 록 명반의 라이벌

<롤링스톤>지 1980년대의 최우수 앨범 100선에는 각각 U2와 R.E.M. 앨범 2장씩이 올라 있다. U2의 것은 당연히

 <Joshua Tree>와 <War>이며 R.E.M.은 데뷔작 <Murmur>와 5집인 <Document>다. 순위가 재미있다.

<Joshua Tree>가 3위, <Murmur>가 8위이며 <War>가 40위, <Document>가 41위에 랭크되어 있다.

잡지 편집진이 두 그룹 앨범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어서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외형상으로는 U2의 우세! 그러나

대중적으로 U2의 인기에 감히 R.E.M.이 필적하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건 R.E.M.에 대한 융숭한 대접이다.

R.E.M.이 U2에 지명도나 앨범 판매량이 처지긴 해도 앨범에 관한 한은 늘 '선전'을 거듭한다. 콜린 라킨(Colin Larkin)이 1994년에 편집한

기네스 퍼블리싱 본 '올 타임 톱 1000 앨범'을 보면 아예 우세승의 주역이 바뀐다. 이 천 장의 톱 앨범 리스트에 U2의 것은 다섯 장,

R.E.M.은 네 장이 포함되어 있다.

U2가 비교 우위인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50위 권으로 국한했을 때는 각각 2장씩 자리잡고 있는데 R.E.M.의 <Out Of Time>이

13위, U2의 <Unforgettable Fire>가 18위이며 R.E.M.의 <Automatic For The People>이 27위, U2의 <Joshua Tree>는 48위를 차지

하고 있다. 여지없는 R.E.M.의 판정승이다.

유심히 관찰하면 <Out Of Time>이 'Losing my religion'과 'Shiny happy people' 등이 수록된 1991년 앨범이고

 'Everybody hurts' 'Drive' 'Man on The moon'이 실린 <Automatic For The People>이 이듬해 출반된 것임을

감안할 때 R.E.M.의 위상은 1990년대 들어서 전보다 더욱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점이 엿보인다.

섣부른 재단일 수도 있지만 훗날 U2는 1980년대의 밴드로, R.E.M.은 1990년대의 밴드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U2

마니아들은 서운하겠지만 1990년대에 U2의 주가가 보합세인 것만은 틀림없다.

U2와 R.E.M.이 서로 긴장과 경계의 시선으로 상대를 의식하는 숙적은 전혀 아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동지적 관계라 해도 무방하다.

두 그룹은 제갈 길을 가면서도 우연히 함께 그들 앞에 버티고 있던 거목을 하나 쓰러뜨렸다. 협공의 승리이며 노선 공조에 따른 축복이다. 

그 거목은 누구인가. 바로 록계의 '보스'로 1980년대 중반까지를 석권했던 '미스터 로큰롤' Bruce Springsteen이다.

콜린 라킨은 단칼에 이렇게 정리한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고결한 지배는 R.E.M.과 U2가 들어오면서 막을 내렸다."

비슷한 중력으로 록계의 호평을 반분(半分)해오다가 갈수록 저울추가 R.E.M. 쪽으로 조금씩 기우는 것은 1990년대가 얼터너티브 록의

평정기였기 때문이다. 그 물꼬를 텄다는 R.E.M.이 특혜를 누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얼터너티브 록의 원조라는 점은 필연적으로 언더그라운드와 '인디'로 범위가 번질 수밖에 없다. R.E.M.은 바로 인디의 내공을 다진 그룹

이다. 커트 코베인의 너바나는 그 폭발의 결과물을 주워 담은 독점 수혜자일 뿐이다.

물론 R.E.M.도 1988년 인디의 암약을 마감하고 메이저 레이블로 편입돼 인디와 안녕을 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워너 레코드사로 말을 갈아

탔어도 인디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음악을 했다. 주류에서 뛰면서도 비주류 음악으로 성공을 일궈낸 것이다. 피터 벅 스스로 "우린 받아

들일 수 없는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밴드가 됐다"고 자랑한다. 이것이 R.E.M.의 위대함 아닐까?

그러나 비주류의 본능을 견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이 폭넓은 수요층의 성원을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셀린 디온의 팬은

분명 R.E.M.의 레코드를 사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름마저 귀에 익지 않을 수 있다.

대중적으로는 U2가 단연 앞서

하지만 U2는 사정이 다르다. 설령 앨범은 안 사더라도 U2라는 이름 두 글자는 안다. 그들은 R.E.M.에 비해 확실히 대중적인 그룹이다.

U2는 데뷔 앨범부터 굴지의 아일랜드 레이블에서 냈다. 결코 인디와 인연을 가진 적이 없다. 그들은 땅 밑의 축축한 습기에서 숨쉬었던

R.E.M.과 달리 언제나 주류동산에서 드넓은 대기와 호흡했다.

그래서 U2는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 앨범 판매량도 R.E.M.은 감히 넘볼 수가 없다. R.E.M.의 <Out Of Time>이 4백만 장일 때 U2의

<Joshua Tree>는 천만 장이다. 그런데 R.E.M.이 상승세를 타는 것은 1990년대 들어 중요성이 비등한 인디와의 관련성 덕분으로 분석된다.

이 대목에서 이렇게 결론을 짓고자 한다. U2의 강점이자 한계는 그들의 '유명성'이고 반대로 REM의 강점이자 한계는 그들의 '익명성'이다.

1990년대의 시각으로는 그렇다.

1980년대로 되돌아가서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U2는 핏기를 완전히 상실한 그 시대의 창백한 록이 다시금 저력과 도전성을 갖추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상업적이었던 메탈 군단에 맞서 파워 록의 진가를 발휘했다. U2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록은 더욱 처참했을 것이다.

이게 바로 U2만의 업적이다.

R.E.M.의 힘은 미국중심주의?

지금에 와서 R.E.M.이 좀더 좋은 자리를 꿰차고 있는 데는 미국중심의 눈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R.E.M.의 음악은

펑크의 D.I.Y. 미학에 버즈(Byrds)나 러빙 스푼풀(Lovin' Spoonful)류의 미국 포크 록을 융합했다. 때문에 상당히 미국적이다. 일부 팬들은

R.E.M. 음악에 루츠(roots) 요소가 있다 해서 의도적으로 배격하기도 한다.

영국 언론도 R.E.M.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인디 출신이건 반항적인 그룹이건 간에 미국성이 내재된 그룹이라는 인식에 의해서다.

U2는 영국에서의 평가가 더욱 낫다. 그들이 영향력을 배양한 곳도 영국이다. U2와 R.E.M.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는 이처럼 영미(英美)간의

뚜렷한 시각 차가 개입해 있다. 우리 입장에선 그래서 비교와 그 의미 캐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U2는 최근 1980년대를 정리하는 베스트 앨범을, R.E.M.은 드러머 빌 베리가 탈퇴하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딛고 신보 <Up>을 냈다. 어쨌든

두 그룹이 지금 시점에선 내리막길에 처해 있음은 분명하다. 앞으로도 U2가 예전처럼 '베스트'를 유지할 지, R.E.M.이 상승을 뜻하는 앨범

명대로 '업'할 수 있을 지 쉽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가 결코 만만하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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