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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는 락큰롤 대중화에 가장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가 과연 락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인지의 여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락큰롤의 위상을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레벨로 끌어올린 최고의 스타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근거는 없다. 엘비스가 나타나기 이전의 락큰롤러
들은 그와 같은 엄청난 스타성을 넘볼 수 없었고, 엘비스 이후 등장한 락커들은 대부분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에게 붙은 ‘락큰롤의 제왕’이라는 수식어는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엘비스 이전에 나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1935년 미국 미시시피에서 태어나 십대 시절 테네시주의 멤피스(Memphis)로 이사한 엘비스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1953년 흑인의 감성을 지닌 백인 싱어를 절실히 찾고 있던 선(Sun) 레코드사의 사장 Sam Phillips에게
발탁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That's All Right Mama’를 필두로 수많은 싱글들이 선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
되었고, 이 싱글들은 멤피스 일원을 중심으로 서서히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56년, 막 수퍼스타로
발돋움하려던 엘비스를 스카웃한 RCA가 선 레코드측에 지불한 금액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35,000달러였다.
1956년 엘비스의 첫 정규앨범 [Elvis Presley]가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오르고, 엉덩이를 유난히 흔들어대는
특유의 정열적(일각에서는 ‘외설적’이라 지탄받기도 했던) 스테이지 매너가 미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하며
엘비스의 인기 가도에는 완전히 불이 붙게 된다. ‘Heartbreak Hotel’,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Hound Dog/Don't Be Cruel’, ‘Love Me Tender’ 등의 싱글들이 공전의 히트를쳤고, 특히 ‘Love Me Tender’는
같은해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엘비스의 영화 데뷔작으로 기록되기도 했다(이 영화는 개봉 3일만에 1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대기록을 세웠다).
엘비스의 이 경이적 히트 퍼레이드는 1957년에도 ‘All Shook Up’, ‘Jailhouse Rock’으로 이어지게 된다.
백인이면서 흑인 감성의 노래를 부르고, 선정적인 춤을 춰대는 이 도발적 싱어에 대해 당시의 기성세대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단적인 예로 당시 최고 인기 TV쇼 중 하나인 The Ed Sullivan Show에
엘비스가 출연했을 당시, 카메라는 엘비스의모습을 가슴 위로만 담아 방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대들은 그런
엘비스에게 열광했고, 그들에 힘입어 엘비스와 관련된 모든 문화상품(음반, 영화)들은 나오는 족족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던 1958년, 엘비스는 미 육군에 입대하며 팬들을 크게 경악시켰는데, 주둔지였던
독일에서 당시 십대 초반에불과했던 소녀 Priscilla Beaulieu와 염문을 일으키며 요란한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제대한 엘비스는 [Elvis Is Back!]을 발표하며 재기에 나섰는데, 이즈음부터 그는 음악적으로는 발라드를
위주로 한 성인 취향으로전환하는 한편 영화촬영에 이전보다 많은 노력을 할애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주연영화들은 잇단 흥행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리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으며, 음악적으로도
예전의 에너지를 회복하지 못한 채 다소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1964년 비틀즈(Beatles)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 벌어지고, 예전
엘비스에게 열광하던 십대들이 나이를 먹고 난 이후로는, 천하의 엘비스도 싱글차트 10위권에 좀처럼 진입하지
못할 정도로 고전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1964년 ‘BlueChristmas’가 1위에 오른 이후, 5년간 싱글차트 10위권에
오른 엘비스의 싱글은 단 2곡에 불과했다).
1967년 그는 성년이 된 프리실라와 결혼하며 정신적 안정을 꾀하게 되는데(이듬해 딸 리자 마리(Lisa Marie)가
태어나기도 했다),1968년 NBC-TV를 통해 방영된 스페셜 쇼 ‘Elvis’가 엄청난 시청률 속에 열렬한 호평을 받자
엘비스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달라지게 된다. 이듬해 [From Elvis In Memphis] 앨범이 싱글 ‘In The Ghetto’의
대성공에 힘입어 전성기에 버금가는 판매고를 올리고, 1971년 [Elvis Country (“I'm 10,000 Years Old”)], 1972년
가스펠 모음집 [He Touched Me] 등의 앨범들이 연달아 빅히트를 기록했으며, 1973년에는 TV 스타답게 위성
중계 실황 앨범인 [Aloha From Hawaii Via Satellite]를 발표해 앨범차트 정상을 밟기도 했다. 또한 5년만의
넘버원 싱글이 된 ‘Suspicious Minds’(1969)를 비롯, ‘There Goes My Everything’, ‘Burning Love’ 등이 싱글차트
에서 크게 선전하며 엘비스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73년의 이혼 이후 엘비스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미 이전부터 대스타로서의 고독함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종종 보였던 엘비스는, 이후로는 아예 멤피스 소재 자택 그레이스랜드(Graceland)에
칩거하며 거의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이 시기 그는 약물에 빠져드는 한편, 식탐을 이기지 못해 비만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1977년 8월 16일, 엘비스는 그레이스랜드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후 약물이 그의
사인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루머가 떠돌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락큰롤 제왕이 서거
했다는 소식은 전세계의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후 엘비스의 수많은 앨범들은 공통적으로
판매고가 급상승하는 현상을 나타내기도 했다.
사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엘비스의 이름을 단 ‘신보’들은 지속적으로 발매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기존의
히트곡들을 다양한 형태로 편집해 만든 모음집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엘비스의 찬란했던 전설을 대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2002년 발매된 [Elvis: 30 #1 Hits]는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전세계에 25년만의
엘비스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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